사진의 약속이 깨졌을 때
: 이하늘의 <스트레인저 Stranger>와 <부머스 Boomers> 프로젝트에 대하여
서동진 (문화비평가/계원예술대학교 교수)
1. 
농담하자는 게 아니다. 이는 정말로 심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물음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전처럼 인물 사진이란 사진을 계속 볼 수 있을까? 인터넷 플랫폼에 사진은 범람한다. 매일 수억 개씩 업로드되는 사진 가운데 다수는 ‘셀피selfie’이다. 오늘날의 ‘디폴트 이미지’는 셀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사진에 깊숙한 시선을 두기보다는 잽싸게 클릭한다. 클릭한다는 것은 어떤 사진을 채택한다는 말이다. 채택된 사진은 질식할 듯이 이어지는 ‘썸네일thumbnail’ 이미지들 속에서 어떤 효험을 발휘하는 능력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그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 과하게 귀엽거나, 예쁘거나, 섹시하거나, 부럽거나 등등의 즉각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뻔뻔하리만치 단순한 감각적 자질로 축소되어 있다(이를 사람들은 ‘글로우 미학glow aesthetics’이라 부르기도 한다). 카메라로 충분히 그런 자질을 얻는 데 실패한다면,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어주는 레시피를 장착한 필터들로 무장한 애플리케이션이 등판하면 된다. 
따라서 인물 사진에서 우리가 구하고자 했던 것은 모두 퇴장했거나 사멸했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윤리적이거나,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사색적이거나,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자각적이거나 하는 미적 경험은 사라지고, 그것들은 그저 예쁠 뿐이다(이를 두고 어떤 이는 ‘귀여움의 미학aesthetics of cuteness’이라 부른다).2 미적이면서 정치적이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인물 사진이 안겨주던 복잡한 경험들은 이제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분홍빛 뺨에 도자기 같은 피부를 지닌, 도저히 봐줄 수 없으리만치 역하게 예쁜 낯이 둥둥 떠다니고, 치골 어디쯤 아슬아슬하게 트레이닝팬츠나 수영복을 걸친 근육남의 “프사(프로필 사진)는 본인”이라는 문구가 얼씬거린다. 우리는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알 수 없고 정서적인 몸짓과 내면의 표현이라 부르던 인물 이미지의 낌새를 찾아볼 수 없다.
2. 
이하늘의 연작 프로젝트 <스트레인저>와 <부머스>는 인물 사진을 제시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인물사진에 관한 모종의 자기지시적인 논평을 제시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런 점이 역력하다. <스트레인저> 연작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인물사진의 경향, 흔히 ‘무표정deadpan 미학’을 따르는 사진이라 부르던 인물사진의 어떤 유형을 원용한다. 사회적 정체성을 어림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을 멀리한 채 각 인물들 즉 젊은 여성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점에서나, 카메라 뒤의 인물과 어떤 정서적인 교감과 유대를 맺고 있는지를 감지하기 어려운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두루 이 사진들은, 익히 보았던 인물사진들을 반복하고 복제한다. 알다시피 이러한 인물 사진의 도상은 패션 사진이나 광고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되어왔다. 
그러나 <스트레인저>는 이러한 무표정하고 비개성적인 포즈의 인물들이 감추려 애쓰는 ‘자기 이미지화self-imaging’의 흔적을 들춰낸다. 이는 매우 희비극적인 숨바꼭질에 가깝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아름다운 사진적 대상이 되는 방법의 코드를 지키려 애쓰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표정하게 카메라 앞에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그러한 코드의 압력에 호락호락 복종하지 않으려는 듯 보인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의 서명이 될 만한 것들을 착장(着裝)한다. 모두 셀피 시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기실 무표정한 인물 사진들은 사진가와 맺는 심리적인 긴장을 상연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진들은 연속적인 사진으로 확장되고 또 특정한 배경이나 조건을 통해 체계화될 때, 단서 없는 그러한 사진들은 모종의 기대와 관찰을 유발한다. 
그러나 <스트레인저>에 등장하는 해시태그 숫자로 표기된 인물들은 그러한 효과를 작동시키기를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무표정한 낯의 틈새 속에서 자신을 효율적으로 이미지화하려는 무엇을 덧붙이고, 그로 인해 그들의 연속적인 이미지들을 따라가면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들은 낱개의 인물 사진들이 하나씩 더해지며 마침내 전체에 이르게 될 때, 우리가 찾을 수 있을 어떤 현 세계의 인물 유형이 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고, 그들이 놀라우리만치 개성적이지만 어쩐지 한결같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인물 사진은 우리가 보게 되는 사진 이미지의 뒤편을 암시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유효한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이미지가 떨어지지 않는 가면처럼 완전히 인물을 엄폐한다면 우리는 이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이 이미지가 되어야 할 때 자신을 이미지로 변신하는 데 즉각 대처한다면, 우리는 그 물샐 틈 없는 방어벽 앞에서 그, 그녀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 없게 된다. 즉 인물사진은 맥을 못 추게 된다.
3. 
그런 점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부머스>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이는 바로 얼마 전인 듯처럼 여겨지는 오형근의 <아줌마> 연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아줌마> 연작은 1997-1999년경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형근의 사진 연작에서 볼 수 있었던 그것, 즉 ‘아줌마’를, <부머스>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을 ‘아저씨’ 연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형적인 도상이든 아니면 규정할 수 없지만 모두가 상상하던 어떤 원형적 이미지의 사례집을 제시하는 것이든, 그 사진들은 우리가 아줌마를 목격하고 있다는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우리는 아줌마가 아니라 한 명의 개인적 초상을 보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진들에서 사진이 지닌 능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하늘의 ‘아저씨 연작’은 그러한 사진들에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음을 증언한다. 우리는 허겁지겁 그사이에 세월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 그사이에 세월은 어떤 농간을 벌인 것일까. <부머스> 연작은 꼼꼼하고 또 매우 세심한 작업으로 이뤄져 있다. 아무개 아저씨를 발견하고 그의 신상을 확인하고 또 그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 그의 구구한 장광설을 들어야 하며 기념사진 외엔 사진에 그다지 익숙지 않을 그들을 카메라 앞에 잠시 멈춰 세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물들이 풍부한 시각적 기호를 배경으로 그들이 공통으로 구성하는 어떤 사회적 세계를 이미지화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하물며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곧잘 호명되는 아저씨라는 괴물 같은 인물을 익히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초상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외려 한 명의 개성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겸손하게 드러내는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이는 인물 사진이 성취해야 할 과업 가운데 하나일 무엇을 좌절시킨다. 그것은 사회적 캐릭터로서의 인물을 그려내는 인물사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하늘의 사진 연작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얼핏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물사진의 위기에 대한 세심한 해부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진이 처한 조건을 찍고 있었던 셈이다. 사진은 약속하고 있었다. 사진적 이미지가 비록 찰나를 포착하고 있을지라도 그 너머의 이미지-인물의 정서, 심리, 나아가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거나 이미지-인물이 놓여있는 사회적 세계의 흔적을 발현함으로써 개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 사이의 놀라운 변증법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 그러한 사진의 약속이 깨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이하늘의 연작은 그것을 보고한다.
1) Dalia Barghouty, Glow Aesthetics, Real Life Magazine, https://reallifemag.com/glow-aesthetics/ 
2) Sianne Ngai, Our Aesthetic Categories: Zany, Cute, Interesting,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
<관념의 표본-공간에서 장소로, 개인으로>
- 글 천수림/사진비평

미묘한 균열을 느끼는 곳, 그 사이에 끼어드는 불안 사이를 건너는 우리들은 모두 ‘중간지점’에 놓여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젠가((Jenga)’라는 게임으로 비유한 조은재, 동시대 밀레니얼 세대의 초상을 아카이빙하고 있는 이하늘, 사물과 텍스트의 해체, 병치를 실험하는 신이호.

이 세 작가들은 모두 경계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과 인간, 개인, 사물 사이의 ‘중간지점’에 서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지점에서 조은재는 ‘판타지아’를 이하늘은 ‘불안’을 신이호는 ‘연극성’을 통해 표면 아래 잠겨 있던 겹, 켜들을 드러내고 있다.

세 작가는 서울이라는 공간과 밀레니얼세대, 개인이 느끼는 중간지점의 간극을 ‘연극’적인 전술로 포장한 동시대, 현재의 단층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커런트 레어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부딪힐 문제들, 그러나 여러 표면, 레이어를 걷어내야만 비로소 보이는 내밀한 것들이다.

이하늘이 진행하는 <Stranger> 프로젝트는 2018년부터 현재까지 약400명의 포트레이트를 아카이빙한 작업이다. 작가는 주로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전해오는 미묘하고 불안한 심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작가는 <Stranger>  프로젝트의 시작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조차 디지털 공간 안의 존재로 인식하는 나의시선에 문득 낯섦을 느끼게되며 Stranger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대상을 보는것과 타인의 관찰대상이 되는 묘한 지점 사이에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그러한 불안감을 직면하는 것은 교묘히 피한 채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통해 불안감의 단서를 흘린다.“
_작가노트 중에서

밀레니얼세대로 구분되는 젊은이들의 초상사진과 손이 있는 부분을 크로핑(cropping)해 보여준 <Gestrures Project> (2019- )도 함께 진행했다.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밀레니얼세대의 초상과 특히 작가 또래의 여성과 마주하며, 작가 자신, 그리고 작업하는 동안에 각자 들켜버린, 낯설음의 실체, 그렇게 마주하며 느끼는 타인을 마주하는 ‘불안’에 노출시키고 있다. <Stranger> 속 인물들은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촬영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촬영된 것이다.

포르투갈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는 『불안의 책』에서 “삶에 동의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과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페소아는 평생 70개가 넘는 이명(異名)으로 작품을 발표한 독특한 작가이다.

페소아는 “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를 만들어냈어. 이 모든 걸 실제 세계의 틀들에 맞췄지.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에 눈금을 매기고, 우정 관계들을 구체화시키고, 내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토론들을 경청했고, 이 모든 것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를 창조한 사람 그러니까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라고 고백함으로써 우리에게 진짜 페소아를 찾아 헤매게 만들었다.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라니... 페소아가 수많은 이명들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작가도 어딘가 닮아 보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동시대 여성들의 이미지를 채집하고 있다.
<Stranger> 속 인물들의 심리는 초상사진 안에서 짐작해볼 수있다. 눈빛과 다양한 옷차림 외에도 작가를 처음만났을 인물들은 손을 나란히, 혹은 겹쳐놓음으로써 각자의 감출수  없는 미묘한 마음을 ‘엿보게’ 만든다. 작가가 포획한 인물들의 각기 다른 반응과 분위기는 그 사람에 대한 모호한 ‘암시’와 미심쩍은 ‘오인’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Stranger>에 이은 <Gestures Project>에서는 인물들에서 ‘손’을 의도적으로 크로핑함으로써 타자의 불안을 정의하는 감정기호를 의도적으로 추출 해냈다.

우리는 모두 나와 타인, 중간지대의 지점에 서 있는 미묘한 불안과 균열 사이에서 서성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코끼리는 여기 없다> 전시서문
- 글 프로젝트룸 신포 큐레이터 이근정
‘모양’, ‘형상’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 상像은 사람 인人 변에 코끼리 상象 자로 이루어졌다. 자전에서는 이 글자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 중국에는 황허 유역까지 코끼리가 서식했다. 그러다가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어 기후가 변하고 인구가 늘면서 코끼리가 사라지고, 후대인은 입으로 전하는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想像으로 그렸다.
<코끼리는 여기 없다>는 이미지의 불완전함, 나아가 이미지의 불능성을 생각하는 전시다. 코끼리를 보지 못하고 정신 작용의 힘으로 그린 코끼리가 그렇듯이, 이미지 속에 실제는 없다. 네 작가는 조작되고 확산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폭주를 응시하면서 그 안에서 움트는 새로운 존재와 인식의 가능성을 더듬는다.  

■ 권기태 _ Telescope Image
이 푸르뎅뎅한 지형은 어느 곳을 가리키는가? 산과 절벽과 바다와 모래밭은 그 형체는 어렴풋이 있되 자신을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작가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이 이미지들을 ‘발견’했다. 망원경의 LCD 모니터에 비친 북한 땅, 그것은 국가가 결정하고 국가가 허락한 이미지였다. 확대하면 할수록 이미지는 흐려지고 보는 사람은 그 지대에 끝내 도달할 수 없다.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시스템이 통제하고 관리하는 이미지를 레퍼런스로 만드는 것이다. 찍힌 것을 찍는 행위로 작가는 이미지의 형성과 전달에 얽힌 의미화 과정에 질문을 던진다.

■ 이하늘 _ Stranger
정면을 향한 시선에서 긴장감이 드러나는 인물들은 작가에게나 관람객에게나 말 그대로 낯선 사람이다. 작가는 길에서 만난 행인을 즉석에서 섭외해 친밀성을 배제한 포트레이트에 도전했다. 처음 만난 사진가의 제안을 받아 카메라 앞에 선 인물은 잠시의 불안과 어색한 기분을 노출하고, 이들의 표정과 제스처는 <스트레인저>의 아카이브가 된다.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외면이 이 초상들의 중심이다.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작가는 사진가의 주체성을 해체하고, 이미지의 속성이 가장 얇은 꺼풀인 표면에 있음을 암시한다.  

■ 박다빈 _ Person.jpg / Find Someone
생성 모델과 판별 모델이 대립하고 경쟁하면서 유사품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딥러닝 프로그램인 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이 생성한 ‘사람’ 이미지를 내세워 인간에 대해 묻는다. 사람 형상을 띠고 있으나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인 Person.jpg는 픽셀, 바이트, dpi 같은 단위로 정의된다. 그 옆에는 데이터 오류가 만들어낸 피조물이 있다. 둘 다 실재하지 않지만 하나는 사람 형상이고, 하나는 사람이 되려다 실패한 괴생물체의 형상이다. 오류와 실수에 주목하면서 작가는 진짜 인간과 인간 이미지를 가르는 것은 ‘행위’라는 가설에 도달한다.

■ 정희수 _ 앵무 / 빠른 호흡
도시와 인터체인지, 불타버린 산을 부감 숏으로 찍은 영상 위에 앵무새를 비롯한 디지털 이미지들이 점점이 겹쳐지는 <앵무>는 이상의 시 <오감도> 6호에서 빌려온 내레이션과 더불어 대칭의 부정 구조를 구축한다. “난 내 이미지가 가짜이길 바라요.” <빠른 호흡>의 이 선언은 ‘원본’이라는 가치를 잃은 대신 접근성과 확산성으로 힘을 얻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미지의 실체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궤도를 통과하면서 오늘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유통되고 인식되는 이미지가 배태한 가능성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Hello, Stranger?>
- 글 조숙현 (미술평론가)


최근 미술판에 해괴한 소문이 하나 나돌고 있다. 1990년대생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미술판에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1990년대는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의 형성과정에서 의미심장한 시기이다. 1990년대 이전이 컴퓨터가 출현하고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전자예술과 실험영상의 형상이 합해져 비디오 아트/컴퓨터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에 열광했다면, 1990년대 이후는 뉴미디어와 하이 테크놀로지가 속속들이 발표되면서 매체 집중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했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는 미디어 아트가 기틀을 잡는 하나의 구심점이 된다.

하지만 1990년대 국내 미디어 아트의 행보를 몸으로 체득해온 평론가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미디어 아트는 기대와 호기심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술 매체에 대한 치열한 실험과 유의미한 담론 보다는, 신기술과 장비에 기존 작업을 접목하는 방식, 기술과 예술을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그치거나 기술이 온전히 작업의 부속 프로세스로 등장하는 작업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과학과 예술에 관한 담론이 진행되었고,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Ars Electronica Festival)1이나 페스티벌 봄, 금천예술공장의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 등의 정기적인 전시와 쇼케이스도 열렸지만, 키네틱 아트와 인터랙티브 아트, 3D 기술과 AR/VR 기술을 응용한 작업 중에서 테크놀로지의 얼개를 넘어 매체와 미디어의 근본적인 철학을 담보한 작품은 만나보기 힘들었다. 즉, 가장 새로운 과정이 가장 낡은 결과에 미치지 못하는 광경을 무수히 목격한 입장에서 미디어 아트는 일종의 권태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의 작업이 궁금해지는 이유는, 현대예술의 한 장르로 완전히 자리 잡은 미디어 아트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과 감각으로 무장한 창작자 세대로의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대와 희망에서 기인한다. 1990년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디지털 장비와 사고방식이 보급화된 이후에 출생한 세대이다. 디지털 세대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미디어 아트에 대한 시각과 감성, 특히 아날로그 환경과 매체를 접할 때의 결과물은 매체 비평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하늘 작가는 사진을 매체로 작가와 타자 사이의 관계성을 탐색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섭외하여 촬영하고 헤어진다. 사람들은 필름 사진의 이미지로 남는다. 이 작업은 <Stranger> 라는 시리즈로 진행되고 있다.  작업은 9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참 하이엔드 패션지가 성행하던 1990년대 <논노>, <보그>, <엘르>, 등의 잡지에서는 ‘스트리트 패션 사진’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젊은 세대들이 자주 가는 번화가에 포토그래퍼를 내보내서 모델 못지않은 패션 센스와 비주얼을 갖춘 일반인을 섭외하여 잡지에 스트리트 포토 시리즈로 싣는 내용이었다. 이 형식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도 잡지에 실리고 패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B급 셀레브리티 하위문화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대량으로 유출하고 싶어 하는 심리와 노출의 수위는 관음증(voyeurism)2에 대한 담론을 무색하게 할 정도이다.

최근 SNS 에서 업로딩하고 리트윗하고 방송하는 어마어마한한 디지털 정보의 양은 일반인들의 셀레브리티 욕망을 반영한다고 보인다.

이하늘 작가의 작업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사진에 담긴 일반인 모델들의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이질적인 정서이다. 작가는 인천이나 부산역 등의 번화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카메라에 담고 싶은 사람을 발견하면 즉석에서 모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리즈로 발전한 사진 속의 사람들을 다시 관객과 비평가의 입장에서 관찰하게 된다. 사진에는 주로 20대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전문 모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포즈와 시선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외모와 차림새는 가지각색이지만, 당당한 포즈와 자유로운 차림이 인상적이다. 반면 모델을 포착하여 전시하는 형식은 보수적이다. 전문 포토그래퍼의 기술로 촬영하고 인화한 필름 사진으로 접하는 일반인의 패션 스트리트 사진은 바로 이 간극에서 묘미를 발휘한다.

두 번째는 디지털 세대에 속하는 작가의 관점이 사진이라는 매체에 녹아들어 발생한 상황에서 포착되는 모순과 정황이다.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조차 디지털 공간 안의 존재로 인식하는 자신의 시선에 낯섦을 느끼게 되며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3 SNS와 인터넷과 가상공간에서 범람하는 이미지와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낯선 사람(stranger)을 촬영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배경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촬영하기 전에는 주변인들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인의 모습과 촬영에 임하는 지인의 자세, 그리고 결과물에서 발생하는 간극에 의문을 느끼며 작가의 연구 잣대를 드리우게 됐다. 예컨대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연출하는 전문적인 노출의 강도와 패턴은 미디어 영상 비평에 있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해석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디지털 세대에게 사진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디지털 공간이 형성되기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에게 가상공간은 대부분 현실 부속 공간 내지는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반면,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사람들에게 가상공간의 영토성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디지털 영토에서의 활동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디지털 세대에 속하는 이하늘 작가가 포착하는 카메라 안팎의 ‘불안감과 오류’는 예리하다.4 미디어 아트라는 것이 결국은 매체의 속성과 시각 예술의 결과를 실험하는 데 치중한다는 점, 사진이라는 초기 매체에 대한 이하늘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다는 점, 그리고 사진과 카메라라는 매체를 담보로 사회관계망 커뮤니케이션과 사람들의 시지각적인 오류를 시각예술의 관점에서 포착했다는 점 등은 이하늘 작가가 앞으로 형성할 사진 매체 작업과 담론에 기대를 갖게 한다. 주변과 작은 것에서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이 던지는 파장이 낡은 권태를 흔든다.

1) Ars Electronica Festival : 매년 9월 오스트리아 린츠(Linz)에서 열리는 테크놀로지 예술 축제이다.
2) voyeurism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르면, 관음증은 성기를 보고 싶어하는 구성 본능에서 비롯한다. 또한 나체 또는 성행위와 관련한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이와 관련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일종의 성적 도착증도 관음증으로 해석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욕망 이론을 통해 관음증적인 시선을 단순 성적 도착증에서 한 단계 발전시켰는데, 이는 다시 현대 영화이론과 영상매체비평, 특히 광고 분석에 유용한 이론으로 활용됐다.
3) 이하늘  포트폴리오 작가노트 중 발췌.
4) “이미지의 소비와 대상에 대한 관음이 이미 익숙한 사람들이 렌즈 앞에 섬으로써 시선의 역전을 경험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으로 해석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경험을 통해 인위적이며 다소 불편한 오류가 발생한다.” 이하늘 작가노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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